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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약속은 캄캄하다 - 홍경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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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3.24  09:5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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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거리는 곁이나 몸의 거리는 가닿을 수 없는 곳에 있어서, 언제나 상상 만남이다. 이방인은 첫사랑을 찾아 이곳으로 왔다. 첫사랑이 중요하다. 현실보다 단연 첫사랑이 더 중요했다. 공허는 갈증은 이기지 못한다. 잊지 못하는 첫사랑은 그래서 독이 된다. 독은 이곳에 온 이방인을 지켜 준다.

 햇볕이 따뜻했다. 희뿌연 대기를 뚫고 내리꽂히는 태양의 힘이 놀랍다.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이방인은 떠다니는 구름을 본다. 떠나고 싶었던 그곳을 떠나왔는데 왜 그곳이 생각날까? 왜 그런지는 이방인도 모른다고 했다. 일조량 탓일까. 삶에 길든 탓일까. 확실한 건 이방인이 앉아 있는 벤치만이 이방인을 받아주고 있다.

 첫사랑은, 안식을 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다. 언제든 찾아가면 그 시절로 돌아가 푸근히 품어줄 듯한데, 아니었다. 이방인으로 살다 반백이 되었으니 생각은 같은데 모습이 바뀌었다. 거리가 사라졌고 길손도 찻집도 옛집도 흔적이 없다. 철없는 감상처럼 깊게 뿌리내린 기억 속에서 강물로 흐를 뿐이다.

 사랑이 사랑을 만나 숨결을 나누던 곳, 한여름 푸른 파도가 흔들어놓은 청춘부터 사시사철 꽃이 피고 지던 세상, 모래톱 빼곡히 차지한 밀어들에 행복했던 시간, 이별 후 엉킨 실타래 길을 걸으면, 파도 소리 갈매기 노래 아침저녁 붉게 피는 노을빛, 가슴으로 수없이 들어와도 이끼를 뒤집어쓰고 있는 기분인데,

 닳아진 뼈의 빳빳한 마찰음에 자신도 모르게 관절에 손이 가는 현실과 힘없이 출렁이는 슬픈 근육이 경쟁하듯 한두 박자 늦어지며 비워지는 기억 주머니, 그렇게 세월은 가고,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폭풍이 세상을 뒤엎는 소리로 요란한 때에도, 매순간 햇볕을 잡으려고 허공에 손을 뻗어 본다.

 창문에 반사되는 유년의 빛이 흰 구름 혹은 소낙비로 하얗게 흐르거나 새파랗게 쏟아져 내리는 오후, 청춘이 청아하게 뜯던 거문고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잘 익은 향기의 까만 씨앗이 콕콕 박힌 기억들이, 낡은 기념사진을 들여다보면, 훌쩍 지나가는 바람에도 시린 낮밤, 이방인의 눈물은 남몰래 허공을 적신다.

 그곳은 가닿을 수 없는 외딴 섬이기 때문이다. 그 섬엔 오로지 향기만 있다. 발을 내딛는 옆이라면 문을 열고 내다볼 수도 있지만 말을 섞을 수 없어 얼마나 답답할까. 수많은 질문들만 켜켜이 쌓여가고, 허공만 떠돌다가 길을 잃고 만다. 그렇게 이별은 이별을 뒤적이다가 해맑게 웃고 만다.

 그래도 가끔 가슴 한켠에 느닷없이 이별이 밀고 들어와 겨울 칼바람보다 더 시리다. 숭숭 구멍 뚫린 시간, 미어지는 가슴은 중심을 세우기조차 서럽다. 이때 눈물은 소금이 되고, 짠 통증으로 수화기 건너에서 들려오는 가상의 대답,“누구세요”가슴 저린 슬픈 언어는 빈껍데기 소라처럼 메아리로 부딪쳐도 돌아오지 않고,

‘노약자’라는 소설을 읽었다. 내용은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소설 속 노약자는 멋있었다. 근데 노약자 대신 심신 미약자로 불러 주면 어떨까? 노약자나 심신 미약자나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은 미약한데, 이제는 허망만 부르는 추억의 깊은 해저 속 심신 미약자인 걸 어쩌겠나.

 꽉 다문 입술이 단단하게 얽혀 있다. 한 줄 바람도 스며들지 않는 극지의 교도소 독방이다. 한때 봄을 기다린 적 있다. 초원 위를 발굽 세우고 달린다. 뒤돌아보면 청춘이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이 저만치서 웃고 있다. 도망칠 수 없는 이번 생, 구부러진 헛소리뿐이구나. 어떤 방식으로든지 핑크빛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포근한 노래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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