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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물품- 윤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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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04.11  13:2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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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덮친 지진으로 한순간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이들의 비참한 영상이 연일 TV 화면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이른 새벽 튀르키예를 덮친 가공할 지진은, 비약 같지만, 칠십여 년 전 한가로운 일요일 아침 우리 강토에 울려 퍼진 북한 탱크의 굉음과 많이 닮았다고 여겨진다.
사전에 어떤 조짐이나 암시도 없이 갑작스럽고도 무자비하게 잠자리를 덮쳐 인명을 살상하고 일상을 풍비박산 낸 튀르키예의 지진이 불가항력의 자연 재해이긴 하지만, 느닷없고 비극적이며 무방비상태로 허를 찔렸다는 점에서 우리의 6.25전쟁 시작점과 비슷하다.
그 때 우리의 많은 장병들은 한가로이 주말 휴가를 나가 있었고, 학교며 관공서는 휴무 중이었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몇 시간 후 일어날 비극은 짐작도 못한 채 초여름 나른한 주말을 나름대로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아비규환은 지금의 튀르키예처럼 숱한 사상자(死傷者)와 고아와 난민을 양산했고, 아직도 우리 민족의 기억 속에 아픔으로 남아 있다.
 
 무너진 건물 더미 옆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추위를 녹이며 식구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수심(愁心) 가득한 튀르키예 이재민들의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게 마음 아프다. 1.4 후퇴 당시 홀어머니와 두 살 터울 언니와 여남은 살의 나도 얼떨결에 가 닿은 부산진역 철로(鐵路)변에 꼭 저런 모습으로 떨며 기약 없이 서 있었지.
 
 마침 핸드폰에 튀르키예에 구호품 보내는 이야기가 떴다. 모포며 코트며 내복이라든가 목도리 모자 등 추위를 덜어 줄 물건으로 집에 있는 ‘계륵(鷄肋) 같은 물건’이면 다 좋다고 했다. 버리기는 아깝고 내가 입기에는 유행이 지났다든가 몸에 잘 맞지 않아 쌓아두고 있는 물건들을 뜻하는 것 같았다.
상자에 담아 내용물의 물목(物目)과 주소를 정확히 쓰라는 조언과 함께 받을 곳의 주소도 적혀 있었다. 나는 마음이 바빠졌다. 선물 받은 새 내복이며 아까워 차마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철 지난 털코트와 담요 등 아파트 생활을 하며 입지 않게 된 두꺼운 옷들이 내게도 상당히 많이 있었던 것이다.
차제에 옷장도 정리하고 좋은 일도 하자며 상자도 준비하고 마음이 사뭇 들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옷장을 열어 물건을 찾아낼 일이 곧 없게 되었다. 
 
 저녁 9시 뉴스를 보는데, 주한(駐韓) 튀르키예 대사관측에서 중고물품은 위생상 사양한다고 한다며 새 물건만 보내라고 한다. 순간 나는 택배를 보낼 수고를 덜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왠지 서운하기도 하고 부끄러운 것 같기도 한 미묘한 감정이 확 엄습해 옴을 느껴야 했다.
아, 위생상 안전치 않다는 것은 아마도 핑계고, 중고물품을 받는다는 게 그들의 자존심상 용납이 안 되는 것이구나 여겨졌다. 그러면서 다시 칠십여 년 전 피난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겨울에 피난을 나갔으니 여름옷이 있을 이가 없었다. 이웃 아주머니를 따라 교회에 간 어머니께서 흰 바탕에 빨간 체크 무늬가 있는 반 소매 원피스를 하나 구호물자라며 얻어 오셨다.
서구(西歐) 어느 나라의 소녀가 입던 옷이었는데, 나는 등이 땀으로 삭아 해질 때까지 고맙게 잘 입었었다. 남이 입던 옷을 받아 입는 것에 어떤 저항감도 없었던 것은 호(好) 불호를 따질 형편도 아니었지만, 준 사람의 순수한 인정을 막연하게라도 고맙게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이런 생각은 이 후로도 이어져 내 아이들을 기르면서 지인(知人)의 아이들이 입던 옷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다 잘 입혔고, 나 역시 내 아이가 입던 쓸 만한 옷들을 지인에게 나누어 주곤 했었다.
 
 TV 보도를 보면,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지진 피해자들의 참상은 쉽게 회복될 것 같지 않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한순간에 집을 잃고, 가족을 잃고,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는 그들의 고통이, 칠십여 년 전 아득한 내 기억을 소환하며 자꾸 마음을 아프게 한다.
물품 보낼 마음은 접은 터라 여러 해 전부터 참여하고 있는 월드비전과 교회를 통해 약간의 금품을 보내는 것으로 안타까운 마음의 빚을 조금 덜고 스스로 면죄부를 줌이 면구스럽기 그지없다. 튀르키예는 6.25 전쟁 때 참전국 중 두 번째로 많은 군인을 보내주어 피 흘려가며 우리에게 도움을 준 나라이기도 하고, 몇 년 전 여행차 가서 만났던 친절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것이 자꾸 신경 쓰이게 하는 것 같다.
 
 크고 작은 여진(餘震)이 계속된다는데, 다시 들려 온 소식이 놀랍고 끔찍하다. 구호물품이라고 우리가 보낸 물건들 중에 더럽고 해어진 넝마 같은 것들이 상당수 섞여 있더라는 것이다.
설마 뜬소문이겠지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만약에 사실이라면, ‘위생상 중고물품 거절’이라고 에둘러 말한 튀르키예분들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죄스럽다. 적잖은 세월을 각종 구호물자로 연명해 온 우리들이다.
은혜를 갚는다든가 선한 사마리아인은 못될망정 상처에 아픔을 더하는 못된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아, 참 많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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