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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화된 다리 - 윤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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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04.25  18:2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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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의 외출로 다리에 또 탈이 났다. 
 왼쪽 무릎은 원래 시원치 않아 조금만 움직여도 존재감을 드러내며 걷기를 거부하는 터지만, 믿고 의지하고 있는 오른쪽 다리마저 하룻밤 자고 나니 무릎을 중심으로 걸음은커녕 앉고 서는 것조차 어렵게 뻐근하고 몹시 아프다. 
차비를 아낀답시고 공짜인 지하철을 이용한 충정은 가상했는데, 내가 올라야 할 지상(地上)으로 가는 수단이 계단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계단이 유독 길어 세 블록이나 되었다. 한 계단 한 발자국씩 혹시 넘어질세라 다리에 잔뜩 힘을 주고 오르내린 게 원인이 되었지 싶다. 되로 받고 말로 갚게 생겼구나, 택시비 아끼려다 병원비가 더 들겠구나 후회막급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곰곰이 되짚어 보니, 그 계단 근처 어디에도 교통 약자에 대한 배려의 흔적이 없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부득이 설치하지 못했다면, 최소한 그런 운행수단이 어디쯤 있다는 안내 표지판이라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긴 무슨 정거장 몇 번 출구로 나가라는 정보만 알고 있는 낯선 곳에서 다른 출구 쪽 편리한 이동수단이 별로 도움이 되었을 것 같지 않긴 하다.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끈질긴 지하철 시위가 이해되고도 남는 어제 오늘이다.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의 눈총을 무릅쓰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끈질기게 시위를 벌임은 이동권(移動權)에 대한 갈망과, 참고 참다 폭발, 인내의 한계가 무너진 결과이지 싶다. 
어쩌다 하는 외출이고, 불편은 하지만 아직은 움직여지는 다리인데도 나는 화가 나는데 말이다. 하긴 좋은 시설이 있어도 가동을 하지 않으면 그림의 떡이다. 
 
 우리 동네 K전철역엔 기역(ㄱ) 자로 꺾인 길 이 쪽과 저 쪽에 각각 오르내리는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멈추어 선 지 여러 해째다. 
처음 얼마 동안은 어떻게 두 곳의 에스컬레이터가 동시에 고장이 났을까 하며 곧 고쳐지겠지 했다. 하지만 해를 넘기고도 몇 년째 서 있는 것을 보니 의도적으로 세워 두는 것 같다. 따로 계단이 없으니 단차가 일반 계단보다 높고 가파른 에스컬레이터 층계를 통해 조심스럽게 오르내릴 수밖에 없다. 
에스컬레이터가 움직일 때도 개찰구까지 이르려면 중간에 함정처럼 버티고 있는 얼마간의 계단을 꼭 지나야 했는데, 그나마 아주 서버리니 불편하기 그지없다. 
왜 운행이 안 되는지 안내문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K역을 이용해 외출하려 할 때마다 오늘은 혹시 하는 희망고문이 거듭되고 있다. 도대체 무슨 생각 아니 무슨 이유로 그 에스컬레이터는 오랜 세월 멈추어 있고, 우리네 교통 약자는 기약 없이 불편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일까.
 
 대문 앞에 계단이 있는 집을 멋있게 여겨, 집 그림을 그릴 때나 소꿉놀이를 할 때면 꼭 대문 앞에 계단을 집어넣곤 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집안에 계단이 있는 2층 집에 대한 로망이 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생애 첫 집으로 장만한 집이 불광동 산동네 대문 앞에 층계가 스무 개쯤 있는 집이었다. 그 집에 살던 1970년대 2년 가까이, 수돗물 사정이 좋지 않아 급수차(給水車)가 올 때마다 양동이에 물을 받아 그 계단을 오르내리느라고 참 고생을 많이 했다. 
그 뒤로 산 집은 슬라브 단층집이었는데, 같은 모양의 앞뒷집이 모두 2층을 올리는 바람에 가운데 낀 우리도 별수 없이 2층을 올리게 되어 젊은 날의 꿈을 이룬 셈이 되긴 했다. 
그러나 청소하기 힘들고 난방비가 부담되어 잘 활용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무렵부터 다리에 노화(老化)의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끈질기게 나를 죄어 왔다. 이후 계단은 짧건 길건 내게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다리에 문제가 있으니 행동에 제약이 많고, 대중교통 이용에도 어려움이 많다. 버스에 오르내리기도 쉽지 않다. 
어쩔 수 없이 버스를 이용할 때 늘 드는 생각이 있는데, 우리 버스 기사님들이 조금만 신경을 더 써 버스를 인도(人道)에 가까이 붙여 세웠으면 하는 것이다. 
시간에 쫓기거나 무신경 혹은 무성의 탓인 듯한데, 대부분의 노인들은 보폭(步幅)이 짧고 다리가 높이 잘 들리지 않는다. 
차도(車道)에 대충 세운 버스에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다. 정부의 장려로 근래 거리에서 많이 볼 수 있게 된 저상(低床)버스는 교통 약자를 위해 최적화한 차량이다. 우선 출입구에 계단이 없어 다리에 힘이 없는 노인이나 어린이가 오르내리기 쉽고,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위해서도 승하차(乘下車)를 용이하게 하는 구조다. 
허나 이것 역시 버스가 인도에 바짝 붙여 멈추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차도에 선 저상버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반버스보다 이용이 더 어렵다. 타고 내릴 때 붙잡고 의지할 만한 물건 즉 일반버스의 출입구 양쪽에 있는 쇠막대기 같은 게 없어서다. 
버스 정류장에 깃발을 들고 서서 ‘버스 인도에 바짝 붙여 세우기’ 캠페인을 벌이고 싶은 심정이다.
 
 작은 친절, 작은 관심이 세상을 밝고 편하게 한다. 그리고 너 나 없이 다리에 힘이 없어지는 때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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