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학교 동창 몇몇이 어우러져서 언제 맞닥뜨릴지 모를 ‘마침표’에 앞서 쉼표를 찍자며 북촌(北村) 나들이를 했다. 모두들 걷는 데 자신이 없는 터라, 작년에 관광객을 대상으로 생겼다는 인력거(人力車)를 이용해서였다.
 인력거는 글자 그대로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수레였는데, 동남아 여행 때 본 것과 비슷하나 훨씬 깨끗하고 쾌적한 이인승(二人乘)으로, 인상 좋은 청년이 부지런히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 수고로써 이동되는 것이었다. 아련한 먼 기억 속 아기 적에 어머니 무릎에 앉아 탔었던, 사람이 두 팔로 직접 끌며 달리던 그런 인력거는 아니었다.
 비원(秘苑) 옆길로 들어서서 조붓한 오름길인 계동 골목을 휘돌아 나오는 코스였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이 직접 설계하여 짓고 살았다는 집을 비롯해 몇몇 전통 가옥을 구경하면서 남 모를 향수에 젖어든 시간이었다.
 어느 대문 안쪽에 세워진 솟대를 보면서는 내 어린 날의 꿈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내 옛집에 대한 아픈 상처 같은 그리움이 극에 달했다. 근처에 모교인 여학교가 있었던 곳이고, 골목 끝자락에는 친구 집이라 드나들던 인촌(仁村) 댁도 있어 아주 익숙하다고 생각한 골목이었는데, 학교도 사람도 이미 그 곳에는 없는 전혀 낯설어진 거리에서 나는 마치 길 잃은 사람마냥 우두망찰 시공(時空)을 넘나들었다.

 모처럼 찍어 본 ‘쉼표’는 활력까지는 아니어도 기분 전환을 준 게 확실했다. 스스로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게 된 것이다.

 살면서 갖는 적절한 쉼표는 삶의 윤활유이다. 한 발자국 물러서서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지친 심신에 다시 용기를 불어 넣어 성공적인 삶을 가능케 할 수도 있다. 일이라든가 어떤 행위를 쉬지 않고 줄기차게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잠시 쉬면서 힘을 충전하거나, 하고 있는 일의 옳고 그름을 점검하거나, 그 진행이 올바르게 되고 있는지의 여부를 검토해야 한다. 작곡가는 적당한 곳에 쉼표를 넣어 음악이 더욱 맛깔스럽고 아름답게 연주되도록 하고, 직장인들의 휴가라든가 학생들의 방학도 모두 본업을 더 잘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엿새를 일한 뒤엔 꼭 하루를 쉬도록 태초부터 정하신 하느님의 뜻은 고단한 인간의 짐을 덜어 주려는 크신 사랑의 배려였다.
 이런 쉼표는 꼭 개인적이거나 혹은 사적(私的)인 어떤 행위에만 해당된다고 생각지 않는다. 곧잘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어떤 집단의 주장 혹은 이념이라든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칠 어떤 외곬의 언행을 끝없이 반복하는 이들도 가끔은 잠시 쉬면서 냉철한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러면서 혹시 궤도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깨닫게 된다면,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결과물이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참 못나게 살아 왔다. 이렇다 하게 내세울 것도 없는 인생을 살면서 늘 전전긍긍하면서 영일(寧日)이 없었다. 항상 줄 쳐진 대로만 사느라고 일상에서의 일탈은 꿈도 꾸어 보지 못했다. 잠시 나를 해방시켜 객관화한 뒤 올바른 방향을 잡아 매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돌이킬 수 없는 이 시점에 와서 가슴을 친다. 개구리가 뛸 때 일단은 몸을 한껏 움츠린다는 사실을 나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옥죄던 대부분의 것들로부터 해방되어 날마다 쉼표의 연속 같은 이즈음도 나는 가끔 강박신경증적인 증세를 보이곤 한다. 옳은 쉼표를 지녀 보지 못한 사람의 발작적 증세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분명한 자국을 내지는 못할지라도 적절한 쉼표가 기쁨이 되고 보람이 되도록 마침표를 찍기까지 애씀으로써 고질병 같은 증세로부터 벗어나야 되겠다.
 며칠 전의 ‘북촌 나들이’란 쉼표는 그냥 쉼표가 아니라 특별한 날을 나타내는 따옴표(‘ ’)였음이 분명하다. 옆 돌아볼 사이 없이 항상 분주하게 쫓기듯 사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간단한 ‘쉼표 기행(紀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