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있다. 모든 계절이 저마다 특색이 있고 아름답지만 그 중에서도 가을은 존재와 사색의 무게가 있는 것 같아 좋다. 소슬한 바람에 나뒹구는 낙엽도, 곱게 물든 만산홍엽(滿山紅葉)도, 일렁이는 갈대숲도, 청풍명월(淸風明月), 천고마비(天高馬肥), 등화가친(燈火可親)이란 사자성어와 접목하면 인생의 의미가 더해질 것이라 여겨진다.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이 찾아 왔다. 결실과 낙화의 계절이다. 상념과 그리움, 우수와 고독, 사색과 동경이 뒤섞여 무작정 떠나는데, 차창 밖에서 세상을 곱게 물들이는 단풍에서 노인을 본다. 노인이 가꾸어 온 후손이 있고, 꿈과 희망으로 똘똘 뭉쳐 사회적 기반을 다듬은 과거가 있고, 그 바탕 위에서 오늘의 우리가 편히 살고 있다. 잘 익은 벼의 참새 떼를 쫓기 위한 허수아비 같은 노인의 경계선 안팎까지 뒷모습이 구겨지지 않게 잘 보살펴야 한다.

 억새로 뒤덮인 오솔길을 혼자 걷는다. 갑자기 나 홀로 이 세상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들 수 있다. 이때 억새의 진한 향기에 취하면, 억새의 웃음소리 들리고, 억새와 다정하게 속삭이게 된다. 이 깨어 있는 마음이 의식(意識)이 아니겠는가. 이 의식을 통해 생명이 태동하는 소리를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다. 가을은 그렇게 일원적 의지로 미래를 향해 출발하는 밑거름이 된다.

 귀뚜라미라 구슬피 우는 밤이면 더더욱,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진한 미래를 약속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멀리 있는 삶에게 편지를 쓰자. 같이했던 시간과 장소, 애틋한 사연들, 나뭇가지에서 끝없이 떨어지는 낙수를 맞던 일, 산자락에 구름이 걸려 끝내 정상을 보지 못했던 일, 빗줄기 사이로 보이는 산세가 오히려 운치를 더했던 일, 이렇게 계절의 해거름에 비낀 햇살과 먹구름을 쓸어 담아 생의 비의를 털어내야 한다.
 
 그래서 가을은 사랑 하는, 받는 계절로 청량하기 그지없을 때 잡다한 세상의 소리가 시원하게 들린다. 어느 삶이나 삶만큼 빛을 만들고 그 빛에 숲이 우거져 아름다우면 아무 곳에나 등을 누이고 피로를 풀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가 오락가락하는 중에도 그것이 오르막길이든 내리막길이든 조급한 마음을 버려야 발길을 가뿐하게 옮길 수 있다. 그럼 들끓고 요동치는 사회 현실에 옹송그리는 두려움은 없어진다.

 당나라 때 장적(張籍)의“추사(秋思)”라는 고시(인용: 당재자전/ 역주, 김영사 간)와 김현승의“가을날”이라는 현대시를 소개 한다.

秋思/장적(張籍)

1.洛陽城裏/見秋風 낙양성리/견추풍. 2.欲作家書/意萬重 욕작가서/의만중.
3.復恐??/說不盡 부공총총/설부진. 4.行人臨發/又開封 행인임발/우개봉
1.낙양성에 가을바람 일어 길가에 잎사귀 날리고/2.집에 편지를 쓰려니 생각만 천 갈래, 만 갈래/3.마음만 바빠 할 얘기 다 못할까 다시금 걱정되어/
4.나그네 출발 임박해서 다시 한 번 편지를 열어본다.

가을날/김현승

가을 햇살이 좋은 오후/내 사랑은 한때 여름 햇살 같았던 날이 있었네/푸르던 날이 물드는 날/나는 붉은 물이 든 잎사귀가 되어/뜨거운 마음으로 사랑을 해야지/그대 오는 길목에서/불붙은 산이 되어야지/그래서 다 타 버릴 때까지/햇살이 걷는 오후를 살아야지/그렇게 맹세하던 날들이 있었네/그런 맹세만으로/나는 가을 노을이 되었네/그 노을이 지는 것을 아무도 보지 않았네

위 고시와 현대시의 주장은 모두 이 가을에 붉게 물든 단풍과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삶의 반추를 통해 새로운 삶의 열쇠를 만드는, 그렇게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회한과 다짐을 소재로 한 시, 감상 어때요? 이 가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