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해 달력이 나도는 것을 보니, 또 한 해가 저물고 있음을 알겠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이라는 개념 위에 크고 작은 마디가 표시돼 하루, 한 달, 한 해라고 구분됨이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다행스럽다. 살면서 갖는 타성이 누룩처럼 들러붙어 있을 때, 한 달 혹은 한 해로 구분된 개념으로 인해, 때로는 심기일전 허리끈을 졸라매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수지(收支)를 계산하고 미련 없이 정산한 뒤 인생 장부를 다시 쓸 계기를 주기 때문이다.
  의례적이고 진부하달 수도 있지만, 연말이 되었으니 나 역시 지난 한 해의 대차대조표를 뒤져 본다. 온 나라를 암운(暗雲)으로 뒤덮은 끔찍한 사건들과, 아직도 대문 밖이 불안하고 못 미더운 세상 속에서, 용하게도 가족 모두가 무탈하게 한 해를 보냈으니, 안도감과 감사가 첫 번째로 꼽힌다. 가까운 친지들 중에도 특별한 애사(哀事) 소식이 없었으니 고마운 일이다.
 연말이 가까워지면 공연히 쫓기는 마음이 되어 허둥거리고, 의미 없이 허송한 시간에 대한 회한 때문에 우울해 하는 게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이 되풀이 하여 드러내는 모습이다. 나 역시 예외일 수는 없어서, 마냥 게으름을 피우고 보내버린 시간들이 아깝기 그지없다. 쌓여 가는 나이에다, 허락된 남은 시간도 가늠되지 않는 처지에 게으름이라니! 정녕 다시 생각해 보아도 구제 불능인데, 이상한 것은 나이 탓인지 예전과 같은 안타까움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현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감사한다.
 나이와 함께 우뇌(右腦)의 기능이 쇠퇴함인지, 연말이 되고, 이어 거리에 현란한 크리스마스 꽃등(燈)이 천국처럼 화려하고, 캐럴이 은방울마냥 영롱하게 울려 퍼지는데도, 별다른 느낌 없이 그냥 담담하다. 젊을 때 같은 설렘이 없다. 그리움 같은 혹은 아쉬움 같은 달착지근하면서도 쌉쌀한 감정에 젖어 밤을 지새우던 일이 먼 기억 속 빛바랜 사진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갈 뿐이다. 무사히 한 해를 또 살아냈구나. 가치가 있는 삶이었는지 혹은 보람된 삶을 살았는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무엇을 계획하여 새로이 일을 벌이거나 목표 달성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겠다는 결심 따위는 벌써 여러 해 전 접었다. 해가 바뀌어도 여태까지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기만을  바란다. 그러다가 혹 길섶에 예쁜 꽃이 피어 있으면 엎드려 들여다보고, 지나는 길 스치는 인연(因緣)들에 사랑과 정을 보태리라 생각한다. 지난여름 우연한 기회에 접하게 된 ‘문인화(文人畵)’도 그런 것이었다.
 모임에서 아는 분이 내가 사는 동네 주민자치센터에서 ‘문인화 교실’을 이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지난 해 내게 전해진 가장 좋은 소식이었다. 그리고 당장 붓과 화선지와 먹물을 들고 찾아 간 것은, 지난 해 내가 한 것 중 가장 잘 한 일이었다. 한 주일에 두 번, 나는 큰 부담 없이 주민자치센터를 찾는다. 시험 같은 학창시절의 옥죔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대가(大家)가 되어 이름을 날릴 엄청난 꿈을 꾸지도 않으니, 그저 그 시간이 즐겁고, 새로운 것에의 탐익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대견하다.
 주민자치센터엘 드나들며 보니, 연령에 구애되지 않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있었다. 서예를 비롯해 외국어며 노래와 춤 등 다양한 과목이 우리 동네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자치센터에서 아주 적은 비용으로 운용되고 있다고 한다. 마음먹고 열심히 참여만 한다면, 우리나라 모든 국민이 한 차원 높은 지식 혹은 기능을 익혀 주민 스스로의 삶도 향상되고, 따라서 나라 전체의 품격도 오를 것 같다.
 상대적 박탈감이 울분을 부채질 하고, 매일 매일 발밑이 무너질 것 같은 불안감으로 쉬 잠 못 드는 우리네 서민들이지만, 한 발 물러서서 주변의 나라들을 돌아보면 그래도 우리는 축복 받은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고생하며 후회스럽게 보낸 지난해는 이제 잊기로 하고, 새 해를 맞으며 새로운 희망과 꿈을 가져 볼 일이다. 하다못해 자치센터마다  평생교육 차원에서 저렴하게 깔아놓은 멍석에라도 심신의 안녕을 위해 올라앉으면 어떨까 싶다. 그런 멍석을 깔 줄 아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참 좋은 나라다. 만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