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안 빈 계란 칸을 들여다보며 또 생각이 복잡하다. 다시 채워 놓아야 할까, 이대로 버텨야 할까.
 조류 독감이 전국적으로 번져 양계장이 초토화되고, 당연한 수순처럼 계란 값이 치솟은 후 내게 나타난 증상이다.  값도 값이지만 혹시 나쁜 바이러스라도 묻어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선뜻 계란을 사 들이지 못하게 하며 번번이 갈등하게 한다.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단백질원으로 계란만한 것이 없고, 완전식품이라고 알려진 데다, 요리도 간편하고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어 떨어질세라 나는 항상 계란 칸을 채워놓고 살아 왔다. 나란히 옹기종기 가득 들어앉아 있는 계란을 보면 마치 부자가 된 것처럼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은, 요즘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 못할 내 살아 온 내력 탓이다.

 주요섭(朱耀燮)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새삼 들춰내지 않더라도 지난 육칠십 년대까지만 해도 계란은 아주 귀한 식품이었다. 손님이나 와야 계란이 밥상에 올랐고, 소시민의 명절 선물로는 짚으로 길게 엮은 꾸러미에 열 개씩 든 계란 한 줄 혹은 두 줄이면 족했다. 

 학교 다닐 때 어머니는 도시락 반찬으로 계란말이를 해서 넣어 주시곤 했는데, 나는 점심시간이면 이 도시락을 자랑스럽게 펴 놓고 먹곤 했다. 그 시절 계란 반찬을 담아 오는 아이들이 드물었던 것이다. 이 후 직장생활을 하는 딸을 위해 아침이면 어머니는 연탄 화덕에서 번철에 계란 프라이를 지져 내셨고, 혼인시킨 지 팔 년 만에 얻은 외손녀 산(産)구완을 하면서는 끼니 때마다 뜨거운 미역국에 넣어 먹으라고 꼭 신선한 날달걀을 한 개 밥상 위에 놓아 주시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딸의 영양을 위한 어머니의 정성이었는데, 나는 어머니도 계란을 잡수시란 얘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어머니가 당신 입에 계란을 넣을 이가 절대로 없었는데도 말이다. 참 다시 생각해 보아도 나는 구제불능이다.

 먹을 것이 흔해지고, 세계 각국의 온갖 좋은 먹거리가 수입되어 사방에 널리면서, 게다가 나아진 생활 형편과 함께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계란은 예전의 귀한 대접을 잃은 게 사실이다. 콜레스테롤을 염려한다면서 계란을 아예 안 먹는 사람이 많고, 삶은 계란에서 나는 냄새가 역겹다며 도리질치는 젊은이도 많다. 한여름 식구들과 냉면을 먹으러 갔을 때 며느리의 그릇에 남겨진 삶은 계란 반쪽을 보면 나는 도무지 아까워서 견딜 수가 없다. 내가 집어 먹을까 갈등하다가 체면상 그냥 돌아설 때도 있고, 그건 계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아이들이 눈총을 주건 말건 집어 먹고 일어설 때도 있다.

 소풍 갈 때 삶은 계란 한두 개를 넣고 가면 그리 신나던 시절, 기차를 타면 꼭 사 먹어야 될 것 같은 삶은 계란을 옆의 친구 머리에 부딪쳐 까며 까르르 웃어대던 시절, 계란보다 비싼 연탄은 깨뜨려도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어쩌다 계란 한 알을 떨어뜨려 깨면 몹시 아까워 안타까워하던 시절이 어제런 듯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결국 마트에 가서 계란 코너 앞에 섰다. 수입 계란이 하얀 껍질을 쓰고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다. 참,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구십 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흰 계란이 대세였었지 하면서 신기하게 들여다보았다.
 레그호온이라는 종류의 흰 닭이 우리 재래종보다 생명력도 강하고 산란율이 좋아 사람들이 많이 선호했었다. 흰 닭이 낳았으니 알은 당연히 흰 색이었다. 그러던 중 갈색 계란이 조금씩 등장했는데, 흰 계란에 비해 노른자가 더 진하고 영양가가 더 높다는 소문이 돌면서 수요가 늘고, 이 후 시장 논리에 따라 흰 계란은 자연히 사라져 갔다. 갈색 계란이 우리 재래종 닭이 낳은 것이란 말이 있지만 틀린 말이고, 역시 산란 위주의 외래종이라고 한다. 노른 자위의 농담(濃淡)은 영양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게 전문가의 말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서너 마리의 닭을 마당 한 옆에 우리를 만들어 놓고 키우셨었는데, 우리 재래종 암탉은 알을 열 개쯤 낳으면 꼭 안으려 하고, 그러면 한동안 알을 안 낳았다. 아마도 그게 자연의 순리였을텐데, 양계업자에겐 당연히 인기가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점차 멸종의 길을 갔을 것 같다.

 사 온 계란을 냉장고에 조심스레 옮겨 놓으며 그 옛날 어미닭을 피해 닭장에서 갓 낳은 알을 꺼내오며 느끼던 손바닥의 따듯한 감촉을 떠올려 본다.  무슨 균이 따라왔는지 모르니 깨끗이 씻어서 잘 익혀 요리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