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정 숙

 선거철이 되면서, 예년처럼 여론조사를 한다며 집으로 오는 전화가 잦다. 조사를 통해 얻은 정보가 어떻게 활용되고 그들에게 무슨 유익을 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받는 입장에서는 성가시고 귀찮다. 바쁘게 집안일을 하는 중에 느닷없이 울리며 받으라고 재촉하는 전화내용이 여론조사인 경우는 솔직히 귀찮음을 넘어 짜증스러울 때가 많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나는 그런 전화에 잘 응대해 주고자 한다. 전화 거는 사람의 수고와 혹시 내 생각이 참고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다. 그런데 황당한 일을 수도 없이 겪고 있다.
 
 얼마 전, 젖은 손을 급히 닦아가며 받은 전화가 오는 4월에 있을 총선을 앞두고 여론조사를 한다는 ARS 음성 메시지였다. 잠시만 시간을 내달라며 협조를 부탁했다. 그런데 나이를 묻는 첫 번째 질문을 따라 전화기의 숫자 중 육십대 이상임을 뜻하는 ‘6’을 눌렀더니 갑자기 전화가 끊겨버리는 거였다. 그래서 전화선에 이상이 있나보다며 별 생각 없이 전화기를 내려놓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 후 며칠이 지나 여론조사를 한다는 전화를 다시 받았다. 역시 여성(女聲) 기계음(機械音)이었다. 첫 번째 항목인 나이를 표하는 ‘6’을 누르자 그 항목에 할당된 숫자가 찼다는 친절한(?) 말과 함께 전화가 뭉텅 끊겼다. 그제야 나는 먼젓번 일의 경위가 깨달아지고, 숫자가 찼다는 것은 핑계일지 모른다고 생각되면서 슬그머니 불쾌해졌다. 이렇게 나이 항목에서 뚝 끊기는 전화를 다반사로 받고 있는 가운데, 며칠 전 늦은 저녁 식사 준비를 하느라고 한참 분주한 중에 받은 전화가 또 여론조사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번에는 약간 탁한 음성의 중년 여인이 직접 걸어 온 전화였는데, 내 나이가 몇인지를 듣더니 아주 낭패한양 당황스럽게 옆의 다른 사람을 바꾸어 달라고 한다. 그러면서 되도록 이삼십대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시비 붙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그런 사람 없다며 간단히 통화를 끝냈지만, 불쾌를 넘은 분노가 마구 부글거림을 숨길 수 없었다. 60세가 넘은 노인들의 의견이나 생각은 알고 싶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으며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한없이 무례한 짓거리들을 하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선거를 통해, 주민들의 지지를 받아 국회의원이 되는 등 새 판을 짜겠다면서, 작년 말 현재 국민의 11%가 예순 다섯 살 이상 노인이라는데, 그보다 훨씬 많을 예순 살 이상 노인의 의견이 왜 무시되는지 알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이 나라에는 젊음은 권력처럼 떠받들어지고, 노인은 가정과 직장 등 사회에서 도태되어야 할 성가신 꼴통으로 비하됨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한평생을 자녀들을 위해 무한책임을 다하고 궁핍과 늙음만을 붙안은 세대일지라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생각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세상사를 읽어 낼 능력도 있고, 자신들이 어떻게 대우되고 있는지도 다 안다. 세상을 살아낸 지혜와 경륜은 뒤에 오는 이들을 위해 귀하게 쓰여야 할 큰 자산일지언정 기피할 혐오스런 존재가 결코 아닌 것이다. 수 천 년 대물림된 가난을 이겨내 오늘의 번영을 일궈 낸 세대의 고초와 인내를 폄훼하고 무시하면서, 혈기를 앞세운 단견(短見)의 젊은이들에게만 아부하는 듯한 저열한 세태에 통분(痛忿)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긴 산전수전을 겪으며 나름대로 터득한 지혜로 주관(主觀)이 확실해진 대부분의 노인들이 일부 계층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겠다. 노인들을 위하는 척 투표하지 말고 집에 편히 있으라던 어떤 정치인의 교활함은 그 불편한 속내를 드러낸 좋은 예가 된다.
 참으로 노인들은, 있어도 없는 사람처럼 그림자로 치부된 오늘의 이 수모를 숙명처럼 체념하고, 그냥 무시당하고 있어야 할까. 몇 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 나라의 운명을 가를 투표 날에, 나를 포함해 약 오백만 명이 훨씬 더 될 우리 60대 이상 그림자 세대들이 부디 옳은 방향으로 꿈틀대기를 기대하는 것은, 내 조상이 살아 지켜 왔고 다시 내 자손이 누천년 살아가야 할 내 나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