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경 흠

 가을 길은 코스모스의 향연장이다. 8월만 해도 초록이 대세였으나 이제는 코스모스가 길을 점령해 버렸다. 흐린 날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 굴욕과 애환을 넘은 초인인 듯 숙연하지만, 맑은 날 흔들리는 모습은 싱싱한 젊음이 손을 흔들며 이상을 향해 달리는 듯하다.

 코스모스가 춤추는 저 멀리 거뭇거뭇한 가지를 늘어뜨린 채 아무렇게나 뻗어있는 한그루의 나무가 있다. 어찌 보면 기력이 쇠하여 힘없는 듯도 하고, 어찌 보면 예쁜 코스모스에 밀려난 낡은 시간 같기도 하다.

 코스모스 길은 날이 갈수록 고운 자태를 뽐내며 거뭇거뭇한 나뭇가지를 휘감았다. 꽃잎마다 몸집을 부풀리고 색도 짙어져 하늘거릴 때마다 땅의 힘찬 고동 소리가 솟아오르고, 하늘의 푸른 기운이 속삭인다.

 답답할 때 코스모스 길을 걸어 보자. 작은 벌레들의 소리를 들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새들의 지저귐도 들을 것이다. 쫓고 쫓기는 듯한 현대인의 삶이 조금은 편해질 것이다. 눈 감고, 귀 막고, 꼼짝 않는 저 빌딩의 사무실이 조금은 편해질 것이다.

 코스모스가 춤을 추고 당신은 밀어를 토해낼 때 길이 길을 안내해 빌딩숲을 어느새 헤집고 다닐지도 모른다. 피곤에 지친 하루하루가 팔 다리 짝짝 벌려 활기찬 하루하루가 되고 직장과 가정은 웃음꽃이 필 수도 있을 것이다.

 거뭇거뭇한 나뭇가지들은 주변에서 새 생명이 탄생하고 소멸하면서 활기 넘치게 생활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자세 그대로 가을을 밟고 서 있다. 어쩌면 자신을 변화시킬 기력을 상실하였는지도 모른다. 다가오는 겨울을 어떻게 지내려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다시 코스모스 길을 걸었다. 코스모스 성(城)은 차가운 바람과 힘겹게 맞서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무기가 없다. 무슨 힘으로 맞설까 눈길을 고정시킨다. 인도의 지도자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이 대영제국을 무릎 꿇린 사실이 난해한 미분 방정식 같이 떠오른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눈길이 멎었다. 한철 그 푸름을 뽐내던 풀들이 누렇게 변색된 채 누워있었다. 볼에는 눈물이 흐르고 입술은 허옇게 말라붙어 있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풀에게 다가가 물었다. 답이 없다. 몸이 뜨거워지는 이유는 뭘까.

 어느새 여기저기서 가을이 가는 소리를 지른다. 지난겨울 힘든 시간을 보내어서인지 말도 섞지 않는다. 너도 힘들고 나도 힘들다. 오랜만에 악수라도 나누려고 애를 썼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참 이상한 세상이지만 코스모스 길을 걷다보면 거기에 답이 있을 것 같아 또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