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영 (세영정형외과 원장)

엄동설한에 온상에 자란 쑥국을 먹는다.
어린 시절 초봄 누님들이 캐어온 쑥으로 맛있게 국을 끓여주시던 젊은 시절의 어머님이 생각난다. 후끈후끈한 진료실 라디에이터 위에 놓인 화병 속에 만개한 버들강아지, 하얀 안개꽃, 노란 플라자 꽃을 바라본다. 진료실 버들강아지는 어느덧 고향 낙서 초등학교 10리가 넘는 등굣길 시냇가에 물오르기 시작한 버들강아지로 겹쳐진다.
 병원 기름 값을 덜려나하고 진료실 창을 열어보니 아직 바람이 차다. 우중충한 빌딩 벽들에 너절하게 붙어있는 간판들, 지저분한 아스발트길, 북적대는 차들의 소음, 어느 것 하나 봄의 전령은 보이질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봄은 스쳐 도망간다.
 사람들에 따라 봄의 전령을 감지하는 방법은 다르다. 혹자는 먼 산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연상하며, 바위 밑을 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에서 느낀다고 했고, 또는 아직은 쌀쌀하지만 가볍고 화사하게 차려입은 여인들의 의상에서 느낀다고 했다.
 나의 오감이 둔해서인가? 내가 개을러서인가? 가꾸어 보기도 전에, 느껴보기도 전에 봄은 사과 꽃향기처럼 언제 오는지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게 사라진다. 단지 춘곤증이 봄을 알리고 이번 봄에도 꽃씨를 뿌리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이 초봄에 진료실에 앉아있는 나에게 전령이 된지도 수년이 되었다.
 초중고 시절에는 내손으로 화단도 만들고 꽃씨도 뿌려보고 구근도 심고 꽃나무도 심었다. 연약한 싹이 흙을 밀고 올라오는 모습이 너무나 신기하고 귀여워 딱딱한 흙을 호미로 살짝 걷어내어 손으로 비벼서 다시 덮어 준다.
 그런데 지금은 책상위에 수북이 쌓인 일간지들, 금방 사인 만하고 잊어버리는 공문 철과 의사회 회람들, 많은 청첩장들, 각종 보험가입 서류와 약품 선전물들... 그 많은 정보들이 혼돈스런 회색갈로 나의 머리를 어지럽힐 뿐 어느 것 하나 풋풋한 영상으로 내게 다가오는 것은 없다.
내 손으로 뿌린 하나의 씨앗도 없는데
화병에는 많은 꽃들이 꽂혀 있고
한강변 강둑에는 들국화 하나 보기 힘든데
예식장에는 화환이 즐비하게 넘쳐난다.
환자와 의사간의 신뢰의 씨앗은 뿌려지지도 않았는데
의료복지 공약은 천지에 만발한다.
믿음의 씨앗이 마음속에 뿌려지기도 전에
십자가의 숲이 밤하늘을 수놓고
절들은 관광명소로 화려하다.
 봄은 소생의 계절, 성장의 계절, 꿈의 계절, 우리의 얼어붙었던 마음을 해빙시켜주고 희망을 부여하는 계절. 그러나 그 길고도 추운 겨울을 인내하고 난후 내가 씨 뿌리고 가꾸지 않은 봄이라면 우리는 다가오는 여름에 어떠한 종류의 탐스럽고 고운 꽃을 우리의 뜰에서는 볼 수 없을 것이고 결실의 가을엔 싱싱한 열매를 맛보고 기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봄에는 수년 동안 얼어붙은 내 마음을 열고 어린 시절 내가꾸미고 다듬었던 작은 뜨락의 꽃밭을 생각하며, 병원의 뒤뜰에도 아파트의 베란다에도 봄이 성큼 다가오기 전에 작은 화단이라도 만들어야 겠다.
 昭汀이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