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 수 (전금천구청장)

시흥동에 정착하기까지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과 함께 꿈에도 그리던 해방을 맞이하여 우리 민족이라면 누구나 벅찬 감동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감동도 잠시, 이념에 따른 분열이라는 현실 앞에서 다시 한 번 우왕좌왕해야만했다.
  북위 38도선 이남에서는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의 군정이 실시되었고, 38도선 이북에서는 소련의 지원 아래 득세를 한 공산당 세력이 인민해방을 표방하고 농지개력과 정적숙청을 자행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당시고향인 황해도 평산에서 제법 큰 규모로 농사를 짓고 계셨던 아버지도 이러한 시대의 소용돌이를 피해 가시지는 못했다. 지주세력이라는 계급적인 굴레에다 농지 개혁의 압박도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38선 이남으로 월남을 단행하셨다 아내와 두 명의 자식, 그리고 사촌형제 1명만 데리고 맨몸으로 38선을 넘으셨던 아버지께서 처음자리를 잡은 곳은 서울역과 가까운 염천교부근 그리고 다섯 식구의 호구지책으로 무작정 엿장수를 시작하셨다고 한다.
  “아니, 누가 감히 여기서 맘대로 좌판을 편단 말이야? 장사를 하려면 자릿세를 내야지.”
  시절이 시절인 만큼 장사가 잘 될 리도 없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건달들이 떼 지어 돌아다니며 자릿세를 요구했다. 결국 마음 편히 장사조차 할 수 없으셨던 아버지는 며칠 만에 장사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염천교를 떠나 옮겨가선 곳은 대림동, 이번에는 노상에서 자전거 수리를 시작하셨는데 역시 뾰족한 생계수단은 되지 못했다. 건달들의 행패를 피해 서울의 도심에서 조금 외진 대림동으로 옮겼지만 어디서건 발붙이기가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 해방이 되고 민초들의 삶은 자꾸만 외곽으로 떠밀릴 수밖에 없었다.
  38선을 넘어 월남한 우리 집안도 다를 바 없었다. 노상에서 자전거 수리를 하던 대림동에서 옮겨간 곳이 시흥동, 서울의 중심부로부터는 더욱 외곽으로 떠밀린 셈이다.
  시흥동 115번지, 아버지께서 어렵사리 정착하신 그 곳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의 고향이다 격동기를 맞아 부모님과 우리집안이 겪은 고난의 역사가 배경이 되고 있는 고향이니 나에게는 유목민의 정착지처럼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피난길에 1원35전이 자산이 전부인 아버님은 자전거 수리점도 그렇고 엿장수도 그렇고 오래 버티시지는 못했지만, 세상과 인생에 대한 아버지의 긍정적인 태도와 가족을 부양해야한다는 책임감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특별한 기술이나 장사 수완이 없으면서도 무슨 일이든 하시려고 했다.
  그러나 삶의 터전을 쉽사리 마련하지 못하고 남의 논밭을 임대경작하면서 살던 중 6.25전쟁이 터졌다. 1.4후퇴 때 충남공주로 피난을 가서 살다가 휴전이 되어 다시 시흥동을 돌아오게 되었다.
  당시 시흥동은 면소재지라고는 해도 사방이 온통 농지뿐인, 그야말로 허허벌판으로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그나마 대한전선이 꼽을 만한 기업체일 뿐,
  ‘제법 직원들이 많은데, 저 사람들이 식사는 어떻게 하지? 밥 먹으러 갈만한 마땅한 곳도 없을 텐데.’
  아버지께서 하루는 우리 집 바로 앞에 있는 대한전선을 바라보고 계시다가 이런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근처가 농지뿐인 허허벌판이니 그런 생각은 당연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이제 어떻게 먹고 살지?’ 하는 고민과 맞닥뜨리면서 ‘냉면집’ 쪽으로 기울었던 것이다.
  ‘그래, 저 사람들에게 냉면을 팔자. 딱히 먹을 것도 없는 이곳에서 냉면을 팔면 그런대로 장사가 될 것이다. 아내가 냉면을 만들고, 내가 배달까지 하면 대한전선 사람들이나 우리나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셈이 되겠지.’
  이렇게 해서 시작한 것이 냉면집이었다. 말하자면 농사를 지으면서 한편으로 식당운영을 겸하게 된 것이다.
  김치말이 국수를 유난히 좋아하셨던 아버지께서는 월남하시기 전에 고향집에서 잡수시던 어머니의 냉면 맛을 기억하고 계셨고, ‘먹는장사를 하면 식구들 밥은 굶지 않겠지’하는 생각까지 겹쳐서 냉면집으로 발전했던 셈이다. 어려운 시절이었으니 밥 굶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냉면집을 창업한 이유로는 충분하겠지만.
  예상을 적중했고, 냉면집은 기대를 휠씬 뛰어넘어 대성공이었다.
  평양냉면을 주로하면서 점심시간에는 대한전선의 직원들을 위해 백반을 팔았는데, 가게는 날마다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 시절의 아련한 기억으로 지금도 가끔씩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 지금의 광명시 뻘 지역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할머니께서 한손으로는 머리에 인 광주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으신 채 한내를 건어 모내기에 새참을 이고 가시며 행복해 하시던 모습 말이다. 생태하천과 생활문화 공간으로 한내를 정비하면서 할머니의 옛날모습을 숱하게 떠올렸고 할머니와 함께 지나다녔던 한내 주변에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종달새 우는 소리 들리던 옛 시절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아버지는 검소한 분이셨다. 냉면집에서 돈을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서 근처에 농토를 마련하여 시흥에 정착 할 작정이셨던 것이다.
  이렇게 사들인 농토가 한해 두 해 지나면서 기하급수로 늘어났다. 내게 중학교에 다닐 당시에는 지금의 경계구역으로 치면 광명시 하안동 상업지역, 하안동 자동차 매매센터단지, 독산1동 개인주택단지 등 여러 곳에 농토가 있었고, 고등학교 다닐 때는 독산1동 군부대 앞과 시흥3동 철재상가 일대, 시흥2동 일대, 광명시 소하동 기아자동차 공장 주변 등에 많은 논과 밭이 있었으며 지금은 이전하고 빈터로 남아 있는 대한전선 옆 TV 생산 공장인 대한 전기공장 터 역시 우리가 농사를 짓던 땅이었다. 우스갯소리로 평양냉면집 땅을 안 밟으면 시흥 땅(지금의 금천과 광명일대)을 걸어 다닐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부자였던 셈이다.
  우기철인 장마가 끝나면 참외밭을 거두고 갈아엎은 다음 배추를 심었다. 일요일에는 아버지와 함께 밭에 나가서 막대기에 DDT라는 소독약을 달아 톡톡 치며 뿌렸고, 곡식을 수확할 무렵이면 틈이 날 때마다 논과 밭을 돌아다니며 깡통을 두드리거나 허수아비를 흔들어 새떼를 쫓는 일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