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정 숙(금천문협이사, 한국문협회원)

 5월의 한 허리를 산촌 누옥(陋屋)에서 보낸 것은 큰 축복이었다.

 달포 만에 조심스럽게 빗장을 풀고 들어선 시골집 마당은 온통 크고 작은 생명들로 수런거리며 북적이고 있었다. 휙 한 바퀴 둘러보는 시야에 모란만이 빈 집에서 홀로 피었다 진 흔적이 보일 뿐, 여러 가지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있었다. 꽃 중의 여왕이라는 작약이 무리지어 소담스런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그 옆으로 색색의 장미가 만만찮은 매력으로 벙글고 있다. 데이지며 아이리스, 꽃양귀비랑 패랭이꽃 등도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가운데, 염치없이 잔디 속에 자리잡은 냉이며 꽃다지랑 미니 팬지마저 작은 꽃들을 피워 방글거리며 생을 구가하고 있었다. 어느 새 꽃을 떨군 정원의 사과, 배, 자두, 복숭아 등 몇 그루의 과목들도 조롱조롱 한가득 작은 열매를 달고 있다. 순간 생명을 다스리며 일군 거역할 수 없는 섭리의 손길이 느껴져 왔다.
 눈을 들어 앞산을 보니 아카시아 꽃이 한창이다. 온 집안에 가득 찬 듯 벌써 전부터 코 끝을 간질이던 상긋한 향기의 정체를 알겠다.
 대문 밖 써레질을 끝낸 논엔 찰랑찰랑하도록 물이 담겨져 있고, 한쪽엔 한 뼘 남짓 자란 모판이 가지런히 놓여 모내기를 기다리고 있다. 무언가 파란 싹이 돋아나고 있는 밭이 있는가 하면, 씨앗을 심기 위해 검은 비닐을 덮어 풀이 나지 않도록 준비해 둔 밭도 보인다. 좀 떨어진 사과 과수원에선 열매를 솎아내는 듯 동네 아주머니들의 바쁜 손길이 보였다. 때마침 멀리서 뻐꾸기의 노래 소리도 들려오고 있다. 필경 밤에는 짝을 찾는 소쩍새의 울음과 개구리의 우짖음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도회지에서 맞는 5월도 나쁘지 않지만, 골짜기마다 논밭을 들여앉힌 산촌의 5월은 경이로움을 넘어 신비롭기 그지없다. 삭정이인 듯한 가지에 새 움이 돋는가 싶더니만 하루가 다르게 짙푸르러지는 나무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한 번 세상과 맞설 결의를 다져 보게 된다.
 그렇다, 5월은 신록과 함께 화려한 꽃들로 가슴이 설레며 동시에 용기 백배 해지는 달이다. 사위에 가득한 오감을 만족시키는 일체의 자연현상들로 해서 가슴 뿌듯하게 충만해지는 달이기도 하다. 그리고 풍성한 가을걷이를 위해 지체없이 준비하고 주도면밀하게 시작해야 하는 달이랄 수도 있다. 가을 풍년을 구가할 노래는 이 때부터 준비되어야 한다.
 
 이십대 초중반의 사회 초년생을 5월에 비유하고 싶다. 싱그러운 자신감과 도전정신으로 사회에 막 한 발 내딛었거나 내딛으려는 젊은이, 그 자리에 안주하기엔 꿈이 크고, 살아내야 할 날도 창창하다. 원대한 포부로 설레고, 이루어질 꿈을 그리며 매일 매일을 알차게 정진하는 젊은이들은, 꼭 5월의 논에 갓 이식되어 흙 속에 뿌리를 야무지게 박고 서 있는 모와 같다고 여겨진다. 한 여름의 거센 비바람과 작열하는 태양의 담금질에도 쓰러지지 않고 버텨 풍성한 가을을 약속하는 벼 말이다. 인생의 보람과 성공을 거두기 위해 나름의 결의와 준비로 무장하고 용감하게 도전하는 세대, 5월 같은 청춘들은 모두 우리의 희망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스스로를 이태백이니 하며 자조한다는 얘기가 있지만, 그것은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하는 비열한 짓거리이고, 자기 비하의 극치이다. 꽃 모양이 모두 다르고 피는 시기도 다 다르듯이, 인생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고, 험난한 미지의 길일수록 탐색하고 새 길을 내는 보람이 있게 마련이다. 하느님께서는 구해야 얻을 수 있고, 두드려야 문이 열린다고 했다. 미리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인생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그대들은 모두 가슴 벅찬 계절, 인생의 5월을 살고 있는 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