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정 숙

 치매 무료검사를 받으라는 통지를 받고 착잡한 기분이었는데, 그 안에는 모욕감도 들어 있었다. 아직은 정신이 말짱하고 기억력이 좋다고 자부해 오던 터라, ‘노인’이라는 테두리 안에 넣어져 도매금으로 취급되고 있구나 하며, 그 부당한(?) 대우에 조금은 억울하고 분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래서 통지문이 적힌 엽서를 구겨 버리며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여러 날이 지났다. 물론 치매 검사 따위는 안중에 있을 이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걸려온 종질녀(從姪女)의 전화가 제 엄마인 내 사촌 올케의 소식을 전해 온 것이다. 치매가 심해져 시설에 넣었다고 했다. 치매로 요양원 입원이라니! 쿵 가슴이 내려앉으며 놀라움으로 순간 머릿속 회로가 마구 얽혀지는 듯했다. 나와는 전혀 인연이 없을 거라며 자신했던 ‘치매’란 마수(魔手)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가까이에서 슬금슬금 그 흉측한 혀를 내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어 가끔 통화만 하던 터고, 나보다는 올케가 전화를 걸어오는 횟수가 많았었다. 같은 말을 되풀이 하며 엉뚱한 소리를 해, 늘 온종일 혼자 집을 지키고 있어 외로운데다 말 상대가 없어 그런가보다 했는데, 치매의 이유 있는 한 증상이었었나 보다. 가스 불 등 집에 혼자 두기에는 너무 많이 위험해, 도리 없는 선택이었단다.
 치매는 스스로 언행이 가늠 안 되고, 판단력이 없어지며, 기억력이 감퇴하는 등 인지능력에 문제가 생기는 병이라고 들었다. 기억력의 감퇴 내지 상실은 관계의 상실 혹은 단절을 의미한다. 모든 관계 즉 가족을 비롯해 친구나 이웃과의 관계 등 모든 사회적인 관계와, 물질을 비롯한 온갖 사물과의 관계 단절은, 도대체 사람을 어떤 상황에 밀어 놓는 것일까. 그 빛깔이 회색일지 검정일지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다. 아마도 사방이 망망대해로 둘러싸인 무인도에 홀로 떨어진 것 같은 공포 혹은 절망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본인은 병의 특성상 혹시 절실히 느끼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속수무책으로 그를 바라보아야 하는 가족이나 친지들의 비애나 고통은 하루하루가 지옥일 게 분명하다.
 치매가 한 개인 혹은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화두로 논의되고 연구된 지는 이미 여러 해 되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알츠하이머에 걸렸음을 고백한 이래 빈번히 인구에 회자되지 않았나 싶다. 치매의 비극을 피하려고 어느 시인은 산의 높이와 강의 길이를 부단히 외었다 하고, 화투를 치고 지하철 역 이름을 외려 하는 범부(凡夫)들의 노력은 모두 그 절망의 주인공이고 싶지 않아서이다.
 이렇듯 치매 예방을 위한 개인적인 다양한 노력과 함께, 우리 사회는 집단적 치매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노력도 병행해야 할 것 같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건망증은 중증(重症)이어서 사실 치매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고야 뇌물 수수 등 비리를 저질렀거나 품위를 떨어뜨린 저질 인사를 거듭 국회의원이나 지자체(地自體) 의원 등으로 뽑아 내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무슨 사건이 터지면 언론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와글와글 대책 없이 떠들다가 곧 잊어버리고, 얼마 안 가 같은 사건 혹은 똑같은 문제를 거듭 일으키곤 하는 행태는 꼭 치매 증상이다. ‘세월호 사건’으로 온 나라가 슬픔 가운데 울분을 토하며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약방문이 처방되고 있는 이즈음이다. 이번에야말로 우리 모두는 정신줄 단단히 붙들어 매고 끔찍한 비극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건강하고 안정된 나라로 거듭 나기 위한 사후 처리를 철저히 점검하고 감독하는 등 집단적 사회치매 증상으로부터 벗어나야겠다.
 구겨 버렸던 치매 검사 통지서를 폐지통에서 찾아내 주민자치센터 상담실로 가서 기초적인 선별검사를 받았다. 병에는 장사가 없고, 공연한 자만(自慢)이 죄로 이어져 사망에 이를까 두려웠던 것이다.
 돌아오는 길, 초여름 은행나무 연녹색 잎이 새삼 정겹게 느껴졌다. 늙은 가슴 속에  숨겨진 소망 그리고 확신, 그것은 숱한 열매를 달 가을 은행나무처럼 이 땅 곳곳에서 오늘도 여린 청춘들이 ‘그 날’을 위해 소리없이 자라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