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시인

    마주 걸어오는 여인의 뒤편에서 가로수 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정작 우수에 잠긴 표정에서 깨어나며 그 광경을 우아하게 바라 보는 사람은 여인과 십 미터 거리를 두고 뒤따라 오는 이십대 젊은 여성이다. 고개를 쳐들고 소심하게 편 양 손으로 휘날리는 은행낙엽을 받으려는 젊은 여성의 안색에는 어느 덧 미소의 화색이 감돌았다. 반면에 낙엽을 일부 털어 낸 은행나무 가지는 헐겁게 가벼워졌다.

  입동(8일)이 지났다. 가을을 만끽해 보기도 전에 겨울문턱에 들어 선 것이다. 월동준비을 해야 한다는 김장이야기가 주부들 입에서 슬슬 내뱉어지는 계절로 본격 접어 든 것이다. 이미 김장을 하고 있는 집도 부쩍 생겨났고, 이 준비에 분주해진 가운데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손익계산을 따져보는 가정도 크게 늘었다. 때마침 인연을 맺어 둔 금천구 치매지원센터에서 오는 24일 구청광장에서 실시 될 사랑의 김장나누기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는 문구가 휴대전화기에 떴다.

  가을걷이를 모두 끝낸 만추晩秋계절의 향기는 역시 국화꽃 축제이다. 마당 흙을 파야 하는 작업으로 잠시 밀어 둘 수 밖에 없게 된 작은 화분을 한 옆으로 치우자 소담하게 핀 여러 송이의 연분홍 소국화 향기가 공기와 함께 폐부로 들어온다. 미풍은 몸매 가녀린 코스모스를 살짝 흔들어놓고 시치미 떼며 지나치고, 푸른 하늘에 둥실 뜬 만월 빛은 한내 물줄기를 반사해 낸다. 한내 길 따라 산책 겸 걷기운동을 즐기는 주민들의 옷가지에서도 은빛이 피어난다. 한내 한복판 뭍에 몰려 있는 청둥오리들이 서로를 달래는 애정의 소리가 가끔씩 들려오는 가운데, 날개치는 소리도 간혹 아련하다. 한편에서는 생활력을 키우는 한 쌍의 오리가 은빛물살을 가르며 있다.

  이상 기후 탓인지 아직은 찬물세수가 가능하다. 춥지도 덥지도 않기에 활동하기에는 더할 나이 없이 안성맞춤이다. 부유는 생활불편을 크게 줄여 준다. 하지만 경제만 외치는 사회는 정신적 빈곤을 낳는다.

   책을 읽는 독서는 앎의 지평을 넓혀줄 뿐만 아니라 언어구사도 다양하게 뿌리내려 진다. 그 사람의 교양은 지식의 산물이요 지식이 겸비된 산업은 경영이 아름답다. 지식인은 자신을 다스릴 줄 알고 길을 잃고 배회하는 사람을 제대로 인도하기도 한다. 몰랐던 것을 깨우치게 하는 힘은 지식이요 자기 계발도 지식이 뒷받침되어 있어야 능률이 향상되는 것이다.

  사례 이야기이다. 동이 트려면 아직은 1시간 가량이 남아 있는 새벽녁이다. 하차 지점이 다가오기에 미리 좌석에서 일어나 카드를 찍었다. 좌석에 눌러 앉아서 내내 잠을 자던 젊은 여성도 벌떡 깨어나 필자 앞에서 카드를 찍었다. 버스가 멈춰 서자 먼저 내린 젊은 여성의 구두 굽 소리가 보도블럭 바닥을 요란스럽게 때린다. 시끄러운 그 소리는  버스 뒤편에서 잠시 조용해졌다. 버스가 출발하자 젊은 여성은 신촌 방향을 얼핏 살펴본 뒤 쫓기는 걸음으로 차도를 가로 지른다. 그녀를 따라 필자도 달음박질을 시작한다. 젊은 여성은 양측 상가 골목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필자는 11월 초순의 어둡고 쌀쌀한 보행로에 서서 사면을 두리번거린다. 동교동 삼거리 일대 면모는 예나 별 반 변화지 않았으나 낯이 설다. 워낙 오랜만에 밟아 보는 발길이라 지리가 생소하다. 문득 좌측 전방에서 깜박이는 신호등이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무릎이 쳐지는 깨달음이 일었다. 젊은 여성을 멋모르고 따랐다 무당횡단 했음을 비로소 알아차린 것이다.

  해가 짧은 추운계절이 다가오며 있다. 바깥 나들이보다 내부 활동시간이 길어지는 겨울철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좋은 시기이다. 정신 없이 바쁘게 뛰면서 본의 아니게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데 더 할 나위 없이 유익한 안방의 계절을 곧 맞게 된다. '너 자신을 알라.'는 희랍의 격언이 주는 교훈은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알아야 유, 불리를 가려낼 수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