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송골김성호 (우리말 연구소소장)

 순흥 안 씨 먼 후손이며 초등학교 동창인 그는 군복무 중에 덮인 사고로 뇌를 다쳤다. 이후부터 그는 지능 낮은 태도를 드러내며 겨우겨우 주어진 삶을 지탱해 왔다. 어렸을 적 추억이나 다니는 낯익은 길목은 또렷이 기억하여 낙오 염려는 덜하나, 문제는 생활력이 상실됐다는 점이다.

그는 구청장을 역임한 초등학교 토박이 선배의 배려로 말단공무원직을 수행하다 정년퇴직을 했다. 다달이 자동 입금되는 그 연금으로 생활을 하며 스스로 학비를 벌어 대학원까지 마친 딸을 시집보냈다. 그는 시간 낭비인 이른 바  방콕 생활의 어두운 무료감에서 나름 탈출해 보려고 일감을 찾아 나섰다. 그의 선택은 공무원재직 시 생활신문 광고를 보고 아내 모르게 사둔 강원도 정선 야산에서의 경험 없는 농사 시작이었다. 날짜를 잡아 몇 십 년을 함께 산 아내와 집을 떠나기로 결정 내린 전날에 우리 몇몇이 조촐한 송별자리를 마련해 줬다. 회원결원 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한편 정신력이 정상하지 못하여 *제겨디디기도 못할 거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가지 말라 말렸던 아내는 걱정으로 나날을 보내야만 했었다.

 무엇보다 파종 씨앗부터 사야하는 돈이 없어 마을회관에서 무료 침식하면서 우후죽순 자란 풀 더미에 뒤덮인 야산 터에 삽질 한번 꽂아보지 못한 그는 몇 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 사실을 들은 한 회원동창이 자기 회사에 취직시키려다 정신이상 증세에다 순발력이 떨어져 그만 거둬들였다. 한때 침술을 배웠다는 그는 다시금 무력감 생활에 순응하다 폐품을 주워 모으는 면모를 보였다. 집 안 대문 앞 통로 변에 빈병, 발로 눌러 밟은 음료깡통 따위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 수집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코흘리개 친구로서 *어정 보다 *살손으로 길게 살아갔으면 여한이 없겠다.

 두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정기모임이 바로 오늘이라 수일 전 문자에 이어 전화를 넣었다. 혼자 오년 여전에 사별한 큰형님 댁(경기도양주)에 설날 앞둔 형수님 인사 차 갔다 돌아오는 중이라는 차안의 친구 음성은 기백 없이 약했다. 그는 말을 돌리다 회비가 없어 모임에 갈 수 없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벌써 십년 넘도록 책임을 다해 소수 모임의 구심을 이끌어 온 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무조건 참석만 하라."고 타일렀다. "그러 마."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통화를 마다한 친구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친구는 위신을 지킨 셈이다. 자존심을 갖췄다는 뜻이다. 자존심이 세워진 문명인은 창피를 안다. 미쳐 날뛴다는 뜻을 지닌 '창'과 옷을 풀어헤치는 행동을 가리키는 '피'가 결합된 '창피' 낱말은 개인에 국한된 감정이나 '부끄럽다'에 비해 어감이 유치하면서도 한결 원초성이 강하다.

 누구든 그 속에 빠져들고 싶지 않는 가난은 운신의 폭을 좁힌다. 한 닢의 동전을 쓰기 전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구차한 가난은 이웃 만남을 극도로 꺼린다. "나는 왜 이 모양인가?"라는 자책이 자신의 존재를 *팃검불로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제겨디디기, 동사- 발끝이나 발뒷꿈치만으로 땅을 디디다.
*어정- 일에 정성을 들이지 않는 대충
*살손- 정성을 다 하는 일
*팃검불, 명사(티껌불, 틴껌불)- 잡티가 많이 섞인 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