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성호

   겨울방학이 시작된 12월24일. 이달 초순 무렵부터 이 날을 손꼽아 기다려 온 원아들은 아침 일찍부터 평소에 제대로 않던 양치질과 찬물세수를 후다닥 마치고 한옥건물 세면장 옆 옷 창고로 몰려든다. 매서운 한기만이 감도는 옷 창고 방에는 계절의복들이 좌우 벽면으로 빼곡하게 쌓여 있다. 한 사람만이 겨우 운신할 수 있는 방안의 좁은 통로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란히 서서 속내의부터 두꺼운 겉옷을 골라내는 두 보모의 양 발가락 끝이 바싹 오므라져 있다. 각각 이십대 초중반인 두 보모는 보호성별 담당 원칙대로 남자 옷 여자 옷을 나누어서 빼내고는 문 앞에서 벌벌 떨며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건네준다.

  공동체 생활을 하는 원아들에게는 내 옷 네 옷이 따로 없다. 개중에는 한 번 입어보고 난 뒤 좋았다면 그 옷을 고집스럽게 다시 찾는 아이는 있지만, 대체로 신체에 맞으면 그대로 받아 입는 편이다. 그래서 보름 남짓 만에 옷을 갈아입는 날이며 어제의 아이 옷을 오늘은 다른 아이가 입고 다니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여기저기 헝겊을 대 꿰맨 속내의도 돌아가면서 입는 형편이다. 영구의 제 옷은 어른직원들이 아이 수준에 맞게 쓴  내용을 당사자가 침 찍은 연필로 칸 편지지에 필사한 후 그 아이의 인물사진이 동봉된 편지가 몇 차례 오고간 뒤 미국의 양부모로부터 소액의 달러송금을 받고 옷을 사 입었을 경우에 한해서이다.

  관리직원의 정식허락을 받지 않고 바깥으로 무단 나돌았다 몰래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들 대부분은 정문을 기피하고 개나리울타리를 비집고 들어온다. 이러한 횟수가 빈번해지자 처음에 개도 넘나들기 힘겨울 정도로 빽빽했었던 생 울타리에는 크고 작은 맨땅 구멍들이 속속 생겨났다. 이러한 전면 통제로 바뀐 환경이 큰 남자아이들의 숙소 뒤편부터 기와지붕 식당 우측  코너까지 블로크담장이 한옥기와가 얹어진 기존의 돌담장과 잇대어 붙여졌다. 그 안쪽 양지바른 식당 밖 우측 붉은 벽돌 벽면으로 몰려든 남자아이들은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곧 들려올 기쁜 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린다. 아이들이 건성으로 딱지치기와 구슬놀이를 하고 있을 때 마침내 한길 저편에서 차량소리가 들려온다. 종이딱지와 유리구슬을 재빨리 챙겨들고 주머니에 마구 넣은 아이들은 앞 다투며 운동장으로 냅다 달린다.

  어둡고 추운 한옥 방에서 공기놀이나 본래의 잔디밭이 맨 땅 마당이 된 방 앞 터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다 남자아이들의 희소식에 놀이를 냉큼 거두어들인 계집들의 한달음도 어지럽게 소란스러웠다. 사온四溫 때 일시 녹았다 삼한三寒을 맞으면서 그대로 꽁꽁 얼어 붙은 아이들의 발자취가 겹겹이 뒤엉켜서 울퉁불퉁 솟아 있는 운동장은 순식 간에 체온의 열기로 달아 올랐다. 원아들 속에는 한 솥밥 식구가 아닌 낯선 아이들 몇몇도 섞여 있었다. 원내 밖에서 가난한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초등시절을 보내는 동네 아이들이다.

  미군장교가 탄 지프차를 선두로 포장트럭 세 대가 차례로 활짝 열린 정문을 통과하여 운동장에 멈춰 섰다. 말 모양의 석상石象이 운동장 한복판 우물을 굽어 보는 높이 낮은 봉우리 동산의 그늘로 아직 아침햇살이 미치지 않고 있기에 된서리가 일부 남아 있는 강단 앞 두 잔디밭 시멘트 샛길로 단정한 차림 새로 외출준비를 마친 김영자 원장이 만면의 웃음으로 걸어 나온다. 피부가 하얀 원장은 미군장교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영어로 몇 마디 인사말을 나눈다. 김영자 원장은 결혼 전에 몇 년 간 미국유학를 했었기에 서양문화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트럭에 먼저 오르려고 우르르 달려든 아이들의 무질서 경쟁이 시작되었다. 큰아이들은 제 힘으로 흘쩍 뛰어올라 좋은 자리를 잡았지만, 체구가 작고 순발력이 미숙하기 짝이 없는 저학년 및 미취학 아동들은 두 팔을 높이 쳐들고 헬로!헬로! 부른다. 한 차량에 두 명씩 짝을 이룬 미군병사들은 이렇게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들을 한 명씩 안아 차에 태운다.

  시흥역 앞 가시철조망이 사면으로 둘러 쳐진  58부대 경내에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대포, 탱크, 트럭 등의 전쟁동원 차량들이 더러 눈에 띠었다. 또한 어디로부터 옮겨와서 흙을 가득 채운 사각 모양의 나무상자에 심었는 지 알 턱이 없는 생 소나무가지에다 얼키설키 얹은 크리스마스트리 불빛이 몇 곳의 막사 앞에서 반짝거렸다. 특별한 의미는 모르지만, 아기예수 탄생의 날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차량에서 내린 백여 명의 원아들은 막사식당으로 안내되었다. 깨끗한 흰 천이 덮인 원탁이 일정하게 배치된 식당 내부는 낮은 천장에서 내리 비추는 전등불빛이 환하면서 곳곳에 배치된 몇 개의 석유난로로 훈훈하였다. 한 식탁에 오륙 명씩 앉은 원아들이 말똥말똥 키운 눈초리로 내부를 둘러보는 동안에 말끔한 군복 위로 중위계급을 단 장교가 환한 웃음을 띄우며 입장하였다. 훤칠한 신장에다 얼굴이 잘 생긴 장교는 모자를 벗고 꼬마 손님들에 손을 가볍게 흔들며 서툰 한국말로 "메리크리스마스!" 의 인사말을 건네었다.

  흰 모자에 흰 가운을 입은 여러 명의 요리사들이 식구대 위에 올리는 줄줄이 식기는 줄을 선 미군병사들 손에 바쁘게 들려져서 각 식탁으로 날라졌다. 식기에는 육질이 좋은 원 모양의 쇠고기에 신선한 야채, 삶은 옥수수에 흰 색의 마요네즈를 버무른 음식물이 담아져 있었다. 원아들은 환경에 따른 예절을 알기라도 하는 지 앞에 놓인 음식물을 얌전하게 들여다본다. 군침이 절로 도는 풍성한 만찬을 어느 때에 먹어야 하는지를 살피는 눈치를 살며시 흘릴 뿐 누구든 버릇없는 짓을 않는다. 어른 중 누군가가 의례 할 대표기도를 기다리는 중이다. 한데 웬일인지 지루하도록 기도하자는 기별이 없다. 전체 배식이 거의 끝나 갈 무렵에 김영자 원장을 포함한 보호자들은 식탁을 돌면서 어서 먹으라며 등을 두들겼다.

  원아들의 수저 사용은 그런대로 수월하였으나, 포크와 식도질은 어리숙하기 짝이 없었다. 앞의 동료가 어떻게 하는 지를 눈여겨 두었다 따라는 하나 포크를 좌우 중 어느 손에 쥐고 식도질은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몰라 난감에 빠져들곤 하였다. 이 광경을 뒤편에서 아이들의 시중을 드는 어른들이 목격하고 시범을 보였다. 큰 아이들은 그런대로 솜씨를 발휘하여 불균형하나마 양념쇠고기를 잘게 썰 수 있었다. 반면에 미취학, 저학년 아이들은 여전히 버거운 손놀림이라 배를 빨리 채우지를 못하였다. 보호자들과 몇몇의 계급 낮은 미군들이 집중 나서서 도왔다.

  내년 이맘 때에나 다시 먹어볼 수 있는 기름진 진수성찬이 아쉽게 끝났다. 누군가가 냅킨으로 입을 닦자 한 식탁의 아이들도 어른 흉내를 낸다. 그러면서 수상스럽게 이리저리 주위를 살폈던 두 아이는 뭉치 냅킨을 상의주머니에다 얼른 넣었고, 다른 아이는 포크와 식도를 옷 속에 숨겼다. 

  식탁의 빈 식기들이 모두 거두어졌다. 낮은 천장의 전등이 전부 꺼지고 전면 일부에서만 빛을 볼 수 있었다. 어느 사이에 수가 대폭 늘어난 미군장병들은 양 벽면 통로을 입석의 겹겹 줄로 가로 막았다. 그 광경은 식탁의 원아들을 둘러 싼 형국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 단발여성이 색동저고리를 입은 남녀아이를 앞세우고 모습을 드러냈다. 단발여성이 물러나면서 등을 떠민 두 아이가 무대 중앙에 서자 우레박수가 터졌다. 교회선생님으로부터 한 달여 간 지도를 받은 두 아이는 우리의 전통민요 능라도 무용을 선보였다. 카메라후레쉬가 여기저기서 번쩍번쩍 터졌다. 유치생들에 이어 저학년 육 명이 남녀 둘씩 둘씩 팔짱을 끼고 좌우로 빙글빙글 도는 율동과 함께 징글배를 불렀고, 5인 씩 두 줄을 맞춘 상급생 남녀 10명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합창했다. 이 순서를 끝으로 크리스마스 이브 축제는 막이 내려졌다.

  맨 앞자리 나이 어린 유아들부터 차례로 일어나 출입구로 다가간다. 그 앞에는 솜 꼬리 달린 빨간모자를 쓰고 하얀 수염에 빨간 복장을 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서 있다. 아이들은 선물 하나 씩 받고 해가 서녁으로 상당히 기운 바깥으로 나온다. 속의 내용물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빨간 망사는 양말 모양의 주머니였다. 그 안에는 종이포장 초콜릿, 지팡이 모양의 줄무늬 사탕, 노란 오렌지 두 개, 철모를 쓴 군인의 엎드려 사격,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기관총 방아쇠를 당기는 전쟁장면을 본 뜬 장난감 따위 등이 개별로 들어 있었다. 위 내용물과 먹거리는 동일하나 여자아이들의 장난감은 옷 입은 작은 인형과 소꼽놀이였다.

  세 대의 트럭이 보초병 선 정문을 향해 서서히 움직이자 마중 나온 미군들이 손을 흔든다. 그 중에 키 큰 미군장병의 입에서 메리크리스마스가 목청껏 외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