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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에서 만난 신기루 - 홍 경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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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5.23  15:4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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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어느 날 대전을 급하게 가야 할 일이 생겼다. 나와 아내는 하던 일을 서둘러 접고  KTX를 타고 광명역을 출발했다. 옷에 철부지처럼 달라붙은 땀이 응석을 부린다. 그 어느 때보다 일찌감치 초록빛이 물들어 창밖 풍경은 온통 지중해의 작고 큰 파도가 넘실거리듯 새 세계를 이룬다. 그리하여 자연은 비로소 액자 속의 풍경으로 탄생하기도 한다. 푸른 산맥 들판 강을 만나면서 이루어 내는 이 변화무쌍한 생성의 축제에 넋을 빼앗긴다.

 창밖에는 한 무리의 새 떼가 날아가고 있었다. 허공을 휘젓는 새 떼는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새의 눈에는 우리들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먹이로 보일까. 적으로 보일까. 저 새 떼가 지상으로 내려와서야 비로소 친구가 되는 것이다. 새 떼는 배불리 먹고 우리는 먹이를 주고, 서로 도우면서 함께 아파하고 위로하다 보면 사랑의 간이 깊이 밴 삶이 전개되지 않을까.

 몸의 기둥인 척추가 아파서 긴급 입원한 친구의 두 손을 꼭 잡고 뜨겁게 시선을 맞닥뜨렸다. 아픔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왔는지 잘 모른다는 말에는? 삶의 견고한 습관 때문에 결여를 잊고 열심히 살았으므로, 목소리도 변하고, 몸도 변하고, 친구도 지웠다는 뜻이 아닐까. 오직 삶을 위한 삶 때문에 삶이 친구를 아프게 만들었다니. 등짝이 서늘했다.

 친구가 밥을 먹기보다는 밥그릇을 먹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목표를 움켜쥐고 되새기고 싶은 기억까지 지워버린 채 앞으로만 나아가는 이 어처구니없는 결과는 허망과 원망뿐이다. 친구여 치열한 삶을 잠깐 멈추고 네 안에 활활 타고 있는 욕망의 불덩어리에 물을 끼얹어 세상과의 충돌을 피하면서 느긋하게 가는 것, 그것이 행복이 아닐까. 누구나 목표점에 다 도착하는 것은 아니니까.

 병원에서 소독약 냄새를 흠씬 뒤집어쓰고 조화로운 LED 광선속을 미끄러지듯 빠져나온 우리는 택시를 타고 대전역에 도착했다. 대합실의 소음 사이를 요리조리 뚫고 ktx 18호차 앞에 줄을 섰다. 18호차란 좌석표를 구입하지 못한 승객들을 위한 공간으로 빈자리가 있으면 누구나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인데, 웬걸 이미 만석이다.

 무릎 관절에 염증이 심하고 그 외 신체 일부가 몇 군데 부실한 부분이 있는 아내가 통로에서 고통을 참고 있는 모습을 본 30대 중년의 남자가 아내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이렇게 고맙고 황송한 일이 일어나다니! 아내와 나는 몇 번이고 청년에게 고개를 숙여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청년의 당연하다는 말씀에, 그 의연한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리고 청년의 목표 완성을 속으로 빌었다.

 고마움의 성의 표시를 청년은 극구 사양했다. 낯선 사람에게 공경의 시간을 듬뿍 안겨주는, 몸에 밴 예의와 도덕성으로 무장한 높은 박애주의는 중독된 이기심에 새로운 자극과 가치를 심었다. ktx도 어둠에 포위된 채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신선한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듯 덜컹거리는 불편을 정리하는 것은 여전히 현재적이다. 그러면서 5월의 ktx는 내일도 달릴 것이다. 한시도 멈추어 있지 않고. 풍경이 있는 이미지들로 기억을 발효시키면서 세기를 뛰어넘어 오래오래 달릴 것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을수록, 길이 없는 것처럼 막막할 때가 많다. 그러나 희망은 언제나 구멍의 햇빛처럼 비쳐 들어온다. 빈틈으로, 절망 사이로, 상처 사이로, 그리하여 용기가 돋아난다. 이 용기가 신기루로 자란다. 신기루 같은 행위는 기어코 신기루가 된다. 아 따뜻하지 아니한가. 초록빛의 풍경과 겹쳐져 멀미까지 가시다니 졸음은 역습의 기회를 어떻게 노릴까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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