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숙
한국문인협회 회원
금천문인협회 회원

  한두 장 남은 달력이 빛바랜 벽에서 힘없이 흔들거리면, 비로소 건성 뛰어넘긴 봄과 게으름으로 한없이 늘어졌던 여름을 후회하곤 한다.
 지난해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바뀐 해에 미처 적응도 안 되었는데 무슨 벌써 가을이고 겨울이냐며, 게다가 또 다시 해가 바뀌느냐며, 뉘게랄 것 없이 앙탈을 부리고 후회를 하고 허둥거렸다. 해마다 되풀이하는 어이없는 부끄러운 짓거리이다. 그러면서 등 떠밀리듯 다시 새해를 맞고 임진년 새 달력을 걸었다. 예년처럼 떡국을 먹고, 집안 아이들의 세배를 받은 후, 의례적인 덕담을 건넸다. 그러나 덧없는 나이가 또 하나 보태졌다는 생각 때문인지, 눈 오기 직전 잔뜩 찌푸린 날씨처럼 우울한 기분이 걷잡을 수 없는 무게로 심신을 눌렀다. 도무지 즐겁지도 신나지도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가슴 저 깊은 데서부터 꼼틀거리며 올라와 온몸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평온하게 맞은 새 해 아침과 그 아침을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음에 대한 감사가 강물처럼 휘감아 돌며 세포 하나하나가 기쁨으로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들이 기실은 보이지 않는 어떤 도움의 손길에 의해 매순간 기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란 깨달음이 왔던 것이다. 매일 겪어야 하는 교통지옥도 그렇고, 지난 해 따라 세상 소문이 얼마나 흉흉했냐 말이다. 연초부터 서민들을 혼비백산시킨 저축은행 사건이며, 이웃 일본의 지진으로 인한 원전 사고 등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들은 비켜 놓더라도, 세계적인 금융 위기 속 무한경쟁의 살얼음판을 잘 살아내고 있는 아이들이 그저 고맙고 대견해졌다. 갑자기 찬 물에 세수를 하고 난 후처럼 정신이 맑아졌다.
  해가 바뀌어 날짜를 1월부터 다시 새롭게 셈하게 한 제도는 생각할수록 새삼 고맙고 신기하다. 영속적인 시간의 흐름에 인위적으로 그은 한 마디인 ‘1월’이 있음으로, 너 나 없이 사람들은 지난해를 반성하고, 주변을 돌아보게 되며, 다시 한 번 용기를 낸 도전을 시도해 보게 되는 것이다. 비록 지난날의 잘못을 지우개로 지워버릴 수는 없을지라도, 어리석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스스로 다짐을 하고,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해야 할 바를 마음 밭에 결연히 새기게 되는 것이다.
  새 해 다이어리 연중 계획표에 적어 둘 일을 궁리하는데, 금년이야말로 나라 안팎으로 중요한 일들이 많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제발 나라 밖의 일들이 우리나라를 휘청거리지 않게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금년에 있을 국회의원과 대통령 선거가 더 이상 국민을 분열시키거나 증오심을 촉발시키지 말았으면 좋겠다. 정말 정직하고 능력 있는 지도자가 뽑혀 우리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국민의 마음을 모아 선진국으로의 행진을 차질 없이 했으면 하는 바람은, 어느 새 간절한 기도가 되어 내 어둔한 입술 위에 얹힌다. 그런 지도자가 뽑힐 수 있도록 옥석을 구분할 혜안을 국민 모두가 가졌으면 싶다.
 누구도 대신해 주지 않는 인생에서 엄청난 은혜로 다시 받아 든 새 해 새날들이 마냥 감격스럽다. 바라건대 아무쪼록 보람 있는 나날들로 채워, 다시 맞닥뜨릴 운명의 이 해 끝 날에는 기어코 흑자 가계표를 손에 쥐었으면 하는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