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정 숙

 십여 년 전 유럽으로 처음 여행을 갔을 때, 파리와 로마 등 유서 깊은 도시에서 거침없이 달리고 있는‘현대 자동차’를 보았을 때의 반가움과 감격은, 세월이 한참 지났건만 어제 일처럼 새롭다. 어깨가 으쓱해지던 치기(稚氣)도 여전하다.
 내 젊은 날은 후진국의 굴레 속의 암담함 그 자체였다. 대물림된 가난에 전쟁의 상흔(傷痕) 마저 껴안고 해마다‘보릿고개’를 힘겹게 넘어야 했다. 변변한 물건도, 물건을 만들 수 있는 기술도, 내세울 자랑거리가 하나도 없어서,‘엽전’이 별 수 있느냐며 스스로를 비하하면서 패배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 일본의 번영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일본의 트랜지스터라디오는 나라 안 젊은이들을 온통 사로잡았고, ‘코끼리 밥통’은 주부들이 갖고 싶은 물건 일 순위였다. 서양의 팝송을 맹목적으로 흥얼거리고, 일본의 만화나 노래를 베껴 발표해서 심심치 않게 구설에 오르곤 했다. 불과 삼사십 년 전 일이다.
 몇 년 전부터인가 드라마의 미남 미녀 주인공을 앞세운‘한류’라는 말이 조금씩 매스컴을 장식 하더니, 요즘은 매스 미디어 곳곳에 좀 과장해 말해서 도배하다시피‘한류’란 단어가 넘쳐나고 있다. 우리의 드라마와 음악이 문화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다니! 자존심 세기로 소문 난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도 우리의 아이돌 그룹이 부른 노래를 서툰 우리말로 따라 부르고 그 춤을 추면서 열광한다는 이야기는 외국에서‘현대 자동차’를 만났을 때의 감격 그 이상의 가슴 벅찬 사건이라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한글을 배우고 싶어 하고, 우리의 고유 음식 등 전통문화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도 우리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 가난과 열등감으로 한없이 허우적거리던 우리네가 아닌가.
 세계로 뻗치고 있는‘한류’에‘시청 앞의 붉은 악마’처럼 흥분하며 대견해 하다가 문득 머쓱해졌다. 세계인이 우리의 저력을 좀 알아차렸대서 지나치게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원래 부자는 부자인 표시를 내지 않는다. 공부 잘 하는 아이도 반장이 된 걸 그리 내세우지 않는다. 서양 것이면 무엇이나 좋아하던 때가 있었다. 그들이 만든 영화에 빠져들고, 주거(住居)나 식사 등 생활양식을 닮으려 하며, 영어 등 외국어를 유창하게 하려고 대를 이어 애쓰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그네들이 미류(美流)니 불류(佛流)니 한다는 이야기를 과문한 탓인지 들어 보지 못했다. 원체 자신이 있으니, 우리네의 짓거리를 보면서 그저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문화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마른 땅을 적셔 가며 굽이굽이 흐른다고 생각한다. 일제(日帝)의 질곡을 벗어나면서 열린 문을 통해 서양 문물이 우리에게 들어왔듯, 그 문을 통해 우리의 반 만 년 축적된 문화와,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오고 있는 재능 DNA가 비로소 서서히 흘러 나가고 있음이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넘치는 게 못 미침만 못하다고 했다. 모처럼 기지개 펴 날갯짓 하는 그야말로‘한류’를 당연하게 여겨 조용히 즐겼으면 싶다. 지나친 떠벌림이 속물들의 우쭐대는 으스댐으로 비칠까 두렵다. 우리의 문화가 세계 도처에 상처 내지 않고 자연스레 스며지도록 이 시점에서 신중한 배려가 필요할 것 같다. 이미 우리의 선조 백제인들은 미개한 일본에 온갖 고급한 문화를 전수하며 문명국으로 탈바꿈시켰으되 대국(大國)의 의젓한 풍모를 끝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